노인의바다 GV 감상 겸 후기



인도의 섬 안다만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다. 쓰나미 참사 후로 희생된 학생들의 빈자리는 커져만 가고, 육지로 이주 명령을 내린 정부의 방침에 의해 사람들은 하나 둘 안다만을 떠난다. 쓰나미에 의해 가족과 학생들을 일시에 잃어버린 노인 교사,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인간의 시간을 저버린채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선물한 바다를 끝내 떠나지 않고 깊은 슬픔에 고요히 생의 끝무렵을 적신다.  
 


죽음, 존재와 운명을 되비추는 통찰의 거울과 거대 이슈 사이    
영화 '노인과 바다'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른 문명권의 다른 영향과 다른 태도들에 대한 것이었다. 문득 장자의 일화에 나오는 세 현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셋 중 한 사람이 죽자 나머지 두 사람이 초상집에 가서 곡을 하지 아니하고 되려 웃으며 축복했고 범인들은 그들의 반인륜(?)적인 태도에 몹시 당황했다는 일화이다. 하루키의 저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담담한 깨달음과 체념의 문장도 떠오른다. 윤회를 믿는 불교와 힌두교 신앙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는 존재의 영원한 질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죽음을 불행으로 여긴다. 동물을, 특히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걱정따위 없이 매 순간 순간을 사는 그들의 시간성에 매혹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동물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학습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므로 늘 영원의 시간을 산다. 한편, 인간은 지능에 의해서 죽음을 학습하고 죽음에 따른 예와 의식과 생명연장의 수단까지 '산업적으로다가' 고안하고 있다. 미디어와 자본주의의 기능이 극대화된 현대에는 홈쇼핑에서 묫자리 풀세트까지 '놀라운 구성'으로 팔고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말에 '호상'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에야 노친네가 치매나 암 등으로 가계를 파탄내는 진상을 부리지 않고 곱게 수면사를 해주면 '아, 살아계실제도 고우시더니 끝마무리까지 호상이셨다.'는 식으로 밖에 사용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나는 호상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죽음을 소박하게 받아들이던, '살아남은 자들'이 폭력적이지 않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게 된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우리 사회에는 본격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집결되는 사회환경 속에서,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승리자로 비치던 공인들의 자살은 수많은 수신자들의 영혼과 공명했다. 우리는 미디어가 그 사람들의 죽음에 달라붙어 뼈까지 발라먹는 과정에 리모콘과 마우스를 붙잡고 함께 입회했다. 죽음이 쇼가 되고 산업이 되는 과정 속에서 개개인이 지키거나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극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인간이 처한 시대와 사회의 현주소를 동시에 환기시킨다. 전자와 후자의 균형이 후자 쪽으로 이지러져 가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까? 여러 작품들에서 여러 예를 볼 수 있다. 미드 '24'의 주인공인 잭 바우어는 한 에피소드당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사람을 죽인다. 가히 사신이라 할만한 그에게는 특수한 '입장'과 '명분'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국가와 사회'라는 거대담론과 맞물려 있다. 잭 바우어에게도 가족과 삶이 있으므로 존재의 고민이 있을 법하지만, '드라마는 전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는 처절한 희생을 감수하며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사수한다. 표현하는 목적이나 방식은 다르지만, 예술이든 통속이든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드 애국물'라는 시대의 첨병격인 이 텍스트는 '국가와 개인'이라는 가치관에 대한 고찰을 제대로 시키는 것 같다.

미드의 정 반대 지점에 있는 인도의 저예산 예술영화 '노인의 바다'로 다시 돌아와서. 인도 사회, 달리 말해 국가와 체제의 촘촘한 작용으로부터 아직 집요한 지배를 받지 않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서의 아시아 사회는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 앞에서 전통과 순리에 의한 자정작용을 시험받고 있다. 쓰나미는 자연 재해였기에 정치적인 해석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듯 보여도, 그것이 극복되는 과정에 있어서 현재 아시아 사회가 앓고 있는 난제와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했다. 참으로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고, 참상을 기록하는 수많은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다.
'노인의 바다'는 곡소리와 국제적인 구호의 노력과 그 모든 것을 덮는 포말의 항상성까지가 걷어진 다음, 그 모든 소요의 한 호흡 뒤에서, 최소의 인원으로 아주 작은 이야기를 길어 올리기 시작한다. '노인의 바다'의 죽음은 극히 작은 사회를 다룬다. (군대, 학교, 직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가 곧 거대한 사회의 원형임을 알고 있으리라.) 해석은 언제나 살아남은 자, 잉여 에너지가 있는 자들의 것이다. 정작 쓰나미를 겪은 당사자들은 대부분 문맹으로 쓰나미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라든지 몇개국에서 몇명이 죽었다든지 하는 합리적인 입장이나 견해를 가질 수가 없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운명의 조류를 타고 생의 연안으로 떠내려가는 과정을 시적으로 영상화했다.

이 영화 속 안다만 제도의 원주민들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슬퍼하되, 그것을 '동물적'으로 받아들인다. 공포과 왜곡으로 인해 복수를 꾀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고) 저항과 개척정신으로 삶의 항로를 변경하지도 않는다. 쓰나미 참사 이재민들의 임시 보호소에 모여앉은 그들은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사건'에 집착하기보다는 '시간'의 무한성에 기대어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린다. '플랜B'가 있을 수가 없는 이런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을 사회복지라든지 제도의 공정함이라든지 하는 문명화된 잣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덧없겠는가.




안다만, 인도사람들, 비밀과 사랑
고아를 비롯한 남인도 일부는 과거 포르투칼령(가톨릭)의 영향으로 인해 시끌벅적한 토착(힌두교) 문화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안다만 제도는 지리적으로도 인도 대륙에서 배를 타고 며칠을 가야 도착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라는 나라, 그리고 민족성이 갖는 '종교와 삶의 혼연일치'에 대해 떠올려 볼 때, 영화 '노인과 바다'가 촬영된 안다만 제도는 그처럼 특수한 정서적 배경은 물론이거니와,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 열대섬의 기묘한 자연조건이 어우러져 이 조용하고 침잠된 영화가 잠언적인 초현실성을 획득하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실로 이 작품의 주된 GIFT는 '자연'이 아닐는지. 주인공의 황폐한 심리에 대한 묘사가 주어진 자연조건만 가지고도 80%는 해결이 됐다.)

인도 배낭여행중에 만났던 인도인들을 기억한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사트야지트 레이를 말하자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죽을때까지 그런 영화는 볼 기회가 없다며 샤룩칸 영화나 보러 가라던 싸이클릭샤 왈라를 기억한다. 강가에서 짜이 한 잔과 비스킷을 먹고 있을 때, 비스킷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자기보다 더 굶주린 개에게 그것을 웃으면서 먹이던 거지 소년을 기억한다. 카쉬미르에서 산 스커트가 장시간의 버스 이동중에 찢어져서 도착한 라자스탄의 어느 수선집에 맡겼더니, 수선값으로 하루 매상에 달하는 금액을 청구하고는 옷을 고치자마자 신이 나서 바로 문을 닫고 놀러가던 어느 골때리던 재봉사를 기억한다.(나같았으면 다른날의 몇 배에 달하는 매상을 올리려고 영업시간을 준수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화장터 앞 강물 속에서 목만 내놓고 잿물을 뒤져 금니나 금반지를 체에 쳐서 걸러내 팔아먹고 살던 불가촉천민들을 기억한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 똥을 싸고, 사진을 찍으면 돈을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돈을 받아 놓고는 선행을 베풀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여기라고 말하는 인도 사람들의 거침없는 통속성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플랜 b가 없는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은 담백하고 우회적이지 않고 즉물적이다. 

인도는 수없는 변화와 전통과 생명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신분제도와 불합리와 빈부격차와 베다와 사기와 인정과 종교갈등과 볼리우드와 구도와 그 모든 것이 살아서 들끓는 곳이다. 지옥이자, 천국이다. 배낭여행자들은 종종 '평생에 걸쳐서 할 경험을 인도 여행중에 다 겪은것만 같다'는 초로의 말을 뱉곤 한다. 나 또한 여행중에 폭탄테러와 지진과 우정과 이별과 병환과 죽음과 환희와 그 모든 것을 경험했었다. 그 곳에서는 누구나 쪽팔릴 것도 없고, 가식을 떨지도 않았으며, 교조적으로 굴 필요도, 허세부릴 것도 없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분별, 민족과 국가의 분별, 자유와 속박의 분별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어떤 초월적인 순간이 찾아오곤 했었다. 삶의 조건과 환경을 불안과 신경질에 의해 선택하며 메뚜기처럼 뛰어 다니던 시절에는, 유토피아가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그 지극단순한 언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지점을 축복스럽게 맞이한 이후부터는 분별을, 분별 자체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게 보람되고 재밌게 살 자격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언행에는 그의 가치기준이 반영된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싶고 받아들이고 싶고 원하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다. 구조적인 한계를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으로 취하는 것도, 운명의 자장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모두 근원적으로는 순수하게 '선택의 문제'라고 나는 비로소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이 '선택'에 재미와 리듬을 붙여 노래하기 위해서 나는 가끔 이렇게 인도 영화를 보고, 인도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창작하고, 그리고 나의 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노래에 융화시켜 나간다. 여행중에 만났던 수만의 가슴저린 눈동자들과, 지금 내 시선을 가린 파티션 너머에 앉아있는 동료는 특화할 것도 망각할 것도 없는 '한 사람'이다. 여행은, 인도는 자유의 원형과 조건을 한 순간 드러내 보여주었고 그것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은 나의 한정된 시선이나 언어로 채보된 기억이 아닐 것이다. 비밀에 대한 뜨겁고 깊고 한결같은 사랑, 자유와 인내가 같은 곳에 있음을 그저 깨닫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인도 민중과 소통할 수 없는 어느 인도 영화의 가을 밤
평범한 인도 사람이 여권을 갖고 외국으로 나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평범한 인도 사람이 델리대학을 나와서 영화를 다시 공부하여 영화를 제작하기란 더 힘들다. 거기서 한발 더 나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중적인 발언권을 가지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다. 평범한 인도 사람이 자국의 예술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극히 미미할 것이다. 

감독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등교하는 아이들,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방식, 이 작은 사회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어떻게, 누구에게 이것을 전해야 할 것인가?'

GV는 꽤 길고 알차게 진행되었고, 자기나라의 관객보다 외국의 NGO적인 감수성을 지닌 관객과 먼저 만나면서 영화 활동을 해야 하는 감독의 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영화는 실로 인도적인 언어로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그러한 '상영과 소통의 여건'을, '직접 이 영화를 보아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 강했다. 여러모로 국경없는 영화였는데, 또한 여러모로 그러한 국경 제반적인 물음표와 느낌표를 곱씹게 했다.

'노인의 바다'보다 며칠 전에 보았던 인도영화 '타한-수류탄을 쥔 소년'은 좀 달랐다. 무슬림과 힌디의 종교 분쟁중에 왕왕 발생하곤 하는 폭탄 테러,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을 뿐더러, 캐릭터가 있고, 뚜렷한 갈등이 있고, 뚜렷한 결말이 있다. 폭력과 비극을 경험하는 주체인 어린이에게 드라마의 모든 열쇠를 주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집중하게 했으며, 북인도 특유의 괄괄하고 부박한 생명력이 잘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노인의 바다'는 여러모로 해체되어있는 텍스트다. 감독은 '쓰나미'라는 사실적인 사건으로부터 촉발하여 '인도 냄새'도 '휴머니즘에의 호소'도 없이, 어둡고 어두운 미장센만을 사용해 주인공의 삶이 점차로 탈공간화되고 탈시간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의 모든 기반이 뿌리뽑힌 주인공은 원주민들의 군무 속으로 걸어들어가 생명의 기쁨과 죽음의 슬픔, 그 모든 얼굴을 지닌 자연과 하나가 된다. (상당히 침체된 노장 사상이라고 생각했다면 웃긴가-_-;)

'노인의 바다'는 재능이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제일 기피하는 아시아 인디영화 타입인, 선진국의 의식있는 관객층에게 자국의 실정을 웅변하고자 만든 깁미쪼꼬렛 오퍼레이터 격의 작품도 아니었기에-죽음과 상실에 대해 모호하게 열려있는 작품이어서 여러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것 같다. 안다만이라는 특수한 곳을 파고드는 감독의 애살이 부재하는 것은 좀 아쉬웠지만, 인도 사람한테 별로 그런 성실한 것은 기대 안한다.-_-; 영화도 영화였지만, 인도사람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영화활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주연 배우인 백인 할배가 택한 인도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GV 질문의 수준이 Piff 연차가 쌓여갈수록 점점 전문성을 띄는 것 같다. 촬영 기법이나 촬영 조건에 대해서 영화학도들의 디테일한 질문이 이어지자 주연 배우와 스텝 하나가 '이런 자리에서 이런것까지 물어보다니'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캐스팅된 아이중에 한 명이 캘커타에서 온 앤데 통역자가 '장님'이라고 통역하자 피프 코디네이터가 '시각장애인이죠.'하고 완전 얄짤없이 지적해서 통역자가 움찔했다. 나도 움찔했다. 내가 통역자라면 신경쓰여서 어제 잠 못잤을 것 같다. 암만 영어를 잘하면 뭘하냐. 장님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튀어나오는데-_-; 인권에 대한 온갖 영화가 다 쏟아져나오는 매체인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다 속상했다.


주말을 넘기고부터는 외적으로 심히 썰렁해 보이지만 상영관은 계속 자리가 차는 것 같다.





감독님, 지못미..-_-; 나도 그랬지만 맨도 화이트 밸런스를 누구한테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을거야..



by Dudits | 2008/10/09 14:20 | 라일락 와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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