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31일
왜곡 너머 선택

인생은 꿈이다.
경험이란 주관과 감각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이다.
한번씩 생생한 장면들이 있다.
의도와 의지를 떠나서 겪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업무일지를 쓰고 일어서 여느때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퇴근시간을 엄수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라 말하고
찾아간 봉하에서는 해가 떨어지자 마자 두꺼비가 울었다.
"와 나 태어나서 저런거 처음 봐"라며 두꺼비를 향해 입구에서 받은 생수병을 던지는 남중생들에게
행렬의 여기저기서 "던지지 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 와서는 좋은 일만 하려는 기분들 사이에 서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문을 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4년만에 보는 대학 동기에게 애써 시덥잖은 농담을 걸면서 2시간 반을 세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티켓팅이 몇 분만 지연돼도 까칠함을 드러낼 초면의 동행자들은 그토록 숙연하게 몇시간동안이나 거북이 걸음으로 나아가며 장례에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어떤 행렬, 어떤 길에 입회한다는 게 한참을 망설여졌지만 이미 몸은 그곳에 있었다.
조문행렬 군데군데 취재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언론 걸러내기를 하고 있는 자봉들도 수순처럼 나타났다.
오늘의 목적과 일체화된 정당한 역할들 속에서 스스로의 슬픔 하나를 정당화할 수 없던 나의 시야에
이윽고 그의 영정사진이 들어왔다.
업무시간 내 맺히던 눈물이 정작 그의 실체 아닌 실체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상징으로 존재하던 그의 죽음을 상징하는 여러 징후들 속에서 시선은 자꾸만 촛점을 잃었다.
그리고 슬픔과 뒤섞인 불편한 기분의 실체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나는, 살아있었다.
그제서야 내 슬픔의 전진을 도울 하등의 목발 찾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흰 국화를 받아들고 그의 사진 앞으로 나아갔다.
묵념을 마치고 한 발짝 떨어진 곳 마련된 밥상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들이키는 벌건 육개장 냄새.
생존의 항상성에 못내 고개돌렸지만 그래, 치욕스러울 것은 없었다.
변화와 왜곡과 믿음과 가치.
그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 보편화돼있기에 국가 또는 가족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삶을 구속한다.
양떼는 울타리를 부순 것이 양이냐 늑대냐만을 보고 줄을 설 뿐 스스로 울타리 너머를 꿈꿀 방법을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일 것을 인간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 자책하며 듣는다.
짐지워진 역할과 고통 너머의 조화와 균형이 늘 '지금'이라 믿으며
학습된 권장된 희망에 조롱당하지 않으며
생생하게 그리고 사이사이 몽롱함을 즐기며 뚜벅뚜벅 걷고 싶었다.
총천연색 목발 투성이, 우여곡절 많은 이 세대에 '광장'이 찾아올 모양이다.
직업을 갖게 되면서부터 가졌던 사회적인 소망은
형태와 규모가 어찌 됐건 재밌고 시원시원한 미디어를 갖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미디어를 거쳐 '먹고 산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오늘로서는
순수를 짓밟는 역할마저도 이 흐름을, 이 반복을 이루는 역할이라는 데에 이해가 닿는다는 것이
되려 서글프다.
차라리 욕을 할 수 있다면.
의식인지 직관인지가 말한다.
네가 어떤 믿음을 가진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구성해갈 수는 있으나
알다시피, 길지만 짧고 흐리지만 또렷한 꿈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가볍게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합장 한 번 하면서.
선택을 선택하라고.
나는 그 일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느 비극적인 밤에 일어난 쓸쓸한 사건을 말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건은 더욱 더 명료해질 것이다. 기억은 공유되어지는 것이므로 또한 고립되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침묵할 것처럼 보이는 사건의 다른 당사자들 또는 목격자들은 이제 서서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멀지않아 그들은 그날 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을 폐기하고 그들의 인생에서 그 날 밤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럼 그들의 인생은 과연 완벽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기억처럼 그들의 인생 또한 불구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설사 그들이 목발을 짚고 지옥에서 만나게 된다 해도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결과는 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소유하게 될 기억 또한 완전한 비극이다. 암흑에 냉기를 더하고 고요함에 소름을 돋게하는 그 밤처럼. 우리들이 된 내가 겪은 그 일은 새까맣고 어두운 것이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기억을 털어놓을 것이다. 이것은 고백이나 반성에 대한 글이 아니다. 나는 내 기억을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들은 내가 되었고, 나는 다시 여러분이 될 것이다. 여러분들은 그 사건의 공모자가 될 것이고 각자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복잡한 우주의 질서가 단조로운 일상에 가려지듯 그 기억은 여러분을 가려놓을 것이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극은 때로는 영원히 여러분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겠지만 여러분들은 그것을 기억 속에 가두고 또 다른 우리들에게 털어놓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되겠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우리들에게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적인 갈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끔 죽음을 대가로 치르는 경우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 위험한 공모에 나는 여러분을 초대했다. 환영하며, 용서를 구한다. 나의 부채감은 계속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 by alex
# by | 2009/05/31 01:32 | 감당의 스티치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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